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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궁을떠나 8일간에 외출하다. / 경기도화성 용주사

국내사진여행

by 새로운 골뱅이 2014. 5. 2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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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찾아온 의궤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8일간 800 여명이 넘는 궁궐식구들과 400필에 말 화려한 외출을 
마지막 정착지가 바로 용주사 입니다 
그때 8일간에 행사준비과정을  빠짐없이  기록물이 의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전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성성을 건설한것도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능을 화산으로 옮겨 온것도 정조가 아버지에 대한효심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서기854년)에 갈량사로  창건되었고 이름은 도량이었습니다


병자호란때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22대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릉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다시지어서
원찰로 삼았다고 합니다

효에사찰 용주사

 

 용주사 기까운곳에 사도세자에 융릉과 정조대왕의 건릉이 있습니다 

 

 

 

잘만든 다큐메리 의괘

ㅡ퍼온글ㅡ


굉장히 잘 만든 다큐멘터리로 의괘라는 행사를 통해

당시 조선사회를 살아있는 것 처럼 살려낸다.


피폐해진 조선사회에 영조가 등장해서 부흥기를 갖지만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파싸움과

  권문세족들의 권력다툼에 사도세자가 희생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정조는

 왕이되어서 그들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피바람이 불까봐 두려워하던 권문세족들은 정조를 죽이기 위해서 여러번 암살시도를 하지만 실패하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어머니, 자신의 무력강화를 위해서 수원에 정약용을 발탁하여

  서구적인 기술과 중국의 벽돌기술을 이용한 화려한 성이라는 화성을 만든다.


유교 사회라는 것이 문관 중심의 정치적인 사회이고 체면, 명분, 충성, 효 같은 경직된

 가치관들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한다는 명분,

 아버지의 무덤을 명당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효성,

  왕으로서의 체면 이런것들이 화성건립의 원동력이라고 보여진다.


의괘라는 행사는 일종의 왕권이 시민과 만나고 자신을 뽐내는 하나의 축제같은 형식으로 곡식을 풀어서 백성을 먹이고

 유교사회의 건립기반인 효를 강조하고 정조 자신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화성은 내부의 정치적인 적 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 - 일본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서구세력을 대비하는 그런 의도도 있을 것이다.
 의괘라는 목판 저작물을 다량 남겼는데 대량 생산으로 일종의 기록 저작물로 blog같은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정조로 정점을 찍은 조선 사회는 점점 내리막길로 치닫고 서구사회의 등장과 세계화,

 기술 물질 문명에 의해 비극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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