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1대 영조는 맏아들 "효장세자" 를 일찍 볼수없는 먼 세상으로 보내고
7년간 아이가 없어 애태웠다고 한다.
그영조는 마흔둘에 "사도세자" 를 얻게 되고 마냥 즐겁고 기쁜마음에 원자의 호를 정하고
왕위를 물려줄것을 결심하게 된다.
"사도세자" 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교육에 힘써줄것을 당부한다.
"사도세자" 가 3세에 이르러 벌써 "효경"을 읽었고
글을 쓸줄아는 영특함에 영조는 기쁘게 여겼고,
어려서 부터 서예와 무예에 뛰어나 "사도세자" 가 14세가 되자
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 을 시작하게 된다
그를 경계하는 노론파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가 모함이 시작되고,
형조판서 청지기 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사실 고변으로 영조가 크게 노하게 된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같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영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아들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 가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 으로 올렸고
다시 1899년에는 "장조(莊祖)" 로 추존되었다.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 임금" 은 생전에
그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려 많은 노력을 한다 .
"노론"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종" 임금이 즉위하여 "사도세자" 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莊祖)" 로 격상한다.
.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 과 건릉(健陵) 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뒤주속에 가두어 무참히 죽게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아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먼 훗날 임금이 되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불러보는
"사부곡(思父曲)" 이 울러퍼지는 듯한 "융릉(隆陵) ,
건릉(健陵)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볼수 있다 .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월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안장 되었다.
영조는 묘호를 "수은묘" 라 하였는 데 그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를 "장헌"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수은묘"를 "영우원" 으로 격상하여 부르게 하였다.
또한 정조 13년에는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 이라 하였다.
그뒤 정조의어머니 "혜경궁 홍씨" 가
순조 13년에 승하함에 따라 이곳에 합장하게 되었다.
그 뒤 고종이 즉위하자 "사도세자" 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莊祖)" 로 격상한다.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 로 추존하여
"융릉(隆陵)" 으로 능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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