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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풍력발전소/내고향 영양석보/ 하늘과 맞닷는곳 그곳엔 바람의 언덕이 있다.

국내사진여행

by 새로운 골뱅이 2014. 5. 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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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하늘이 만나고  하늘과맞닷는 오지에 땅 / 영양풍력발전소

 

 

영양군 석보면 요원리 맹동산 이곳은 하늘과 맞닷는 곳입니다.

동해에서 연중 일정하게 불어오는 해풍, 더 넓고 광활한 바람에언덕, 이곳은 풍력발전소로써 최적에 조건을 갖춘곳입니다.

 

해발 800미터가 넘는 이곳은 고냉지 채소로 유명한 맹동산에

바람의 언덕 능선을 따라 조성된 풍력발전소가 있습니다.  

 

고냉지 채소밭과 한우목장은   

해발800미터로 봄이 일직 찿아오지 않습니다.

  

5월에 초순은 이제막 나뭇가지에 푸른잎을 보이기  시작했고

목장은 겨우 새 풀잎들이 이제막 올라옵니다

이른봄 4월초에 피기시작한 할미꽃이 이곳에선 이제 만개했습니다.

철죽도 진달래도 아직 꽃망울을 터트리지 않았습니다.

 

겨울내내 축사에서 봄을기다리는 한우들은 아직 외양간에서 봄을 기다림니다.

해 넘어갈 무렴 자동차 게기판에 찍힌온도는3.5도 5월10일에 날씨 치고는 엄청 야박한 기후입니다.

쌀쌀하기보다는 춥다는 표현이 적적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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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적 고향친구와 맹동산,

그 친구는 지금 포항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등학교까지 10Km 넘는길을 새벽밥 먹고 도시락 허리에 차고 달리고 뛰어서 학교에

도착할때면 학교 종이 울린다 .

 겨우 지각을 면할 쯤 친구는 등교를 한다

집이 멀어  또래에 동갑내기보다 3살이나 많은 형같은 친구가 나 어릴적 친구다.

 

맹동산 가는길은 멀고도 험한길 원리3동 임마리 삼거리를 지나면 초등학교 친구 홍규 병삼이가 살았고 

주남골엔 형규, 만섭이, 세곤, 진곤, 정화,  등등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이 살았다.

학교 다날때 말썽많은 진화도 그곳 주남골에 살았다.

 

명동산가는길은 주남골 입구에서 요원으로 우측으로 간다

또 그곳엔   영도, 승태, 연태, 용우가  살았다.

 

요원리도 석보면소재지 초등학교에서 20리길이다.

그곳에 친구들은 언제나 새벽밥에 도시락 허리에 차고 뛰어 다녔다 .

 

그땐 책가방이 없던시절이다

  양은 도시락에 밥을담고  한쪽에 구석에 반찬을 칸막이해서 고추장아니면 김치를 담았다.

책보  한모서리에 에 책과도시락을 올려놓고  돌돌말았서 끝부분에 핀으로 고정시키고

양쪽 끝으로 허리에 묵고 달렸다.

 

도시락밥엔 언제나 반찬물이 붉게 물들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면 쉬쿰한 쉰네가 났다

그래도 그때 그도시락에 제일 맛있었다 .

 

수업이 끝나고 하교할때면 언제나 도시락속 반찬통이 딸그락 딸그락 소리가났다.

우린 그소리를 들으면서 언제나 논드랑길을  뛰어 다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초등학교1학년때부터 소 풀먹이고 농사일을 도왔다

재산목록1호 소는 아예 우리들이 키워야하는것을 알고 살았다. 

 

그때 농사일이 없는 가정형편이 좀 어려운 친구들은 집에는 소도없고 농사일도 없어서 

당나무 거리에서 놀고 지네는 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울때도 있었다.

 .

 

그땐 주남에 분교가 있어서 초등 3학년까지는 분교에서 공부를하고 4학년땐 좀 컷다고 읍내 학교로 달리고 달려서 왔다.

지금같아선 상상도 할수 없는 50년전 호랑이 담배피우던시절의 이야기다 .

 

그곳보다 더 먼곳에 친구가 살았다.

우리보다 세살많은 원한이가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6학년 어는봄날  맹동산 자기집에 놀러가자는 친구말듣고 멋 모르고 따라 갔다가 외박을 하고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굽이굽이 돌아도 돌아도 산길을 걸어야  한 그 친구집 맹동산중턱위  늦은밤에 집에 도착해

보리밥에 큰 감자를 저녁으로 먹었다.

 

 그때 그곳엔 논은없었고 온통 산비탈에   개간한 감자밭 뿐이었다.

그땐 그곳에 차도 우마차도 갈수 없는 오지에땅, 오직 교통수단이라곤 검정고무신을 타고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곳 오지가 나에 고향이고 친구에 고향이다.

 

세월이 지나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시골서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먼 안동으로 나왔다

 

그때부터 자유가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이면 공부한다는 핑게되고 시골집으로 가지 않았다.

 

군용텐트에 석유곤로 배낭에 넣어서

데여섯놈이 몰려다니면서 그때 유행했던 무전여행도 했다.

풍기 희방사역에서 기차표없이 몰래타고온 기차 역무원한테 들통나 따가운 여름햇살에 온종일

풀뽑은 잊지못할 추억도 있다 .

우리가 도망칠까 역무원아저씬 학생증을 담보로 잡아 두었다

도망가면 학교로 신고한다는말에  우린 고분고분 말도 잘듣고 풀뽑는 사역을 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나에 시골생활은 점점 멀어져갔다

 

지금은 그때 그친구들은 시골엔  아무도 없다

최근에서야 하나둘 골짜기마다 옛 터전 찿아간 친구도 몇몇있다.

 

귀농

다들 촌놈들이 고무신 신고 뒤어다녀서 그런지 서울 부산 대구 에서 다들 잘산다.

헝거리 정신이야 말로   새마을정신보다 한등급 위다

그래서 다들 말없이 잘사는가 보다.

다들 있어야 하는곳에서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가끔 안부 전하면서 대소사에선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다 .

 

골뱅이의 고향

어쩌튼 그곳 맹동산에 바람개비 발전소를 촬영하고 왔다.

가는길 돌아오는길내내 머리속엔 여기는 누구집 여기서 물고기잡고 놀았는데.......

온갓 추억들이 한편에 영화처럼뇌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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